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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8-01 (수) 09:57
ㆍ조회: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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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 ”
조선 영조 때 이인좌 등 소론 일파가 정권의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
영조가 경종의 세제(世弟, 왕위를 이을 아우)가 되어 정치를 대신하는 데 반대하다가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에게 정권을 빼앗긴 소론의 일파는 남인 중 과격파, 지방의 토호 및 사대부 등 정권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했다. 이들은 흉서(凶書)와 괘서(掛書) 등을 통해 경종이 죽은 원인에 의혹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동조자를 규합하기에 노력했다. 그러나 1727년(영조 3) 탕평책의 일환으로 일부 노론이 실각하고 온건파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정미환국) 더 이상의 동조자 확대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 이들은 거사에 들어갔다(1728. 3). 이인좌·정희량(鄭希亮) 등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규명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청주를 함락시켜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내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격문을 이웃 고을에 돌려 정부에 반대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고 칭했다. 삼남 일대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한때 삼남지방의 통치체제가 마비되었다. 원래 반란군은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도 동조자를 규합해 반군에 호응하도록 계획을 세웠으나 이 사실이 조정에 미리 알려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이인좌는 안성에서, 정희량은 거창에서 각각 관군에 패함으로써 반란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인좌의 난은 외형적으론 봉건양반층 내부의 정권다툼의 연장이었으나,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볼 때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재건방향을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에서 탕평책 실시의 명분을 찾아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노론의 반대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조선왕조의 사회개편 방향은 노론정권의 의도대로 추진되어 나갔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엮음, 2007,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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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7-31 (화) 19:18
ㆍ조회: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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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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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7-31 (화) 18:44
ㆍ조회: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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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삼 장군 부인 ”
문헌 설화속 인물이야기(한국설화)
 
이삼장군의 본관은 함평이고 충남 논산 상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감역을 치러 감역공이었다. 이삼은 윤명재 선생에게 글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근력이 왕성했다. 이삼은 칠월이면 씨름을 하러 다녔는데 그의 부인은 이삼보다 지략이 많고 힘 또한 이삼을 능가하였다. 이삼이 힘만 믿고 씨름판을 전전하는 것을 보고는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가서 이삼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다. 씨름판에 가보니 이삼을 대적할만한 장사가 없어 이미 씨름판이 끝날 분위기였다. 부인이 이삼과 한 판 겨루기를 청하여 씨름을 하게 되었는데 부인이 어린아이 넘어뜨리듯 이삼을 내동댕이치고는 소는 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이삼이 기가 죽은 모습으로 소를 끌고 돌아왔다. 부인이 그런 이삼을 가리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음을 일러주고 함부로 힘을 쓰지 않도록 하였다. 얼마 후 이삼은 역적모의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말총을 뽑아 말발굽을 묶어 말이 달리지 못하게 해두었다. 이삼이 역당을 만나러 말을 타고 가려는데 말이 달리지 못하였다. 부인이 하늘의 뜻이라며 이삼을 말려 이삼은 역적모의에 가담하지 않기로 하였고, 얼마 후 임금이 붓 한 자루를 하사하였는데 부인이 그 붓대를 쪼개어 보니 그 안에 역당을 물리치라는 조서가 숨겨져 있었다. 정파싸움이 분분한지라 붓대 속에 조서를 숨겨 하사하신 것이었다. 부인의 지략으로 이삼은 역당을 물리치고 임금의 신임을 얻어 후일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영조는 이삼을 특히 신임하여 그가 죽었을 때 사패지지(賜牌之地)를 주고 백일헌(白日軒)이라는 호를 친히 내렸다. 이삼의 묘를 쓸 때 묘가 파헤쳐지지 못하도록 돌로 봉분을 삼았는데, 후일 이삼의 가문에 9대째 과부가 나서 묏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묘를 파헤치려 하였으나 봉분이 돌인지라 감히 파헤치지 못하였고 훗날 그의 8대손에 이르러 후손이 번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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